많은 중국인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선진기술을 전파하며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타이완과 류구 중 대륙에서 가깝고 덩치도 큰 타이완보다 류구가 역사의 무대에 먼저 등장하고 더 화려한 배역을 맡은 사실이 일견 뜻밖이다.중국 직항이 가능한 선박과 항해술이 확보될 때까지 류구 항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황제가 보내주지 않아도 수요는 공급을 불러오게 마련이다.류구 조정 내의 친일-친중 대립을 말하기도 하는데.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타이완을 ‘소(小)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타이완의 존재도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타이완의 배경에는 망망대해뿐이었다.
‘타이완(臺灣)이란 이름은 17세기에야 확정되었다.[사진 위키피디아] 류구는 두 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260여 년을 지내게 되었다.
중화제국이 남해안까지 확장되고 이슬람제국이 인도양 연안까지 확대되면서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지만.그런데 타이완의 실체는 중국에서 14세기까지도 명확하지 않았고.
황금알 사라지자 잡아먹힌 거위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 예술가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도 한다.